쌀 두 말
천사백사십육 년 가을, 한양 궁궐 부엌에는 비가 조금 샜다. 궁궐 서리 박도윤은 젖은 신을 벗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부엌을 맡은 한씨 아주머니는 무명 소매를 걷고 무국을 끓이고 있었다. 젊은 여자 연이는 젖은 장작을 불 옆에 세웠다.
도윤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에는 이달 안에 부엌 사람들에게 새 글자를 가르치라고 적혀 있었다. 도윤이 말했다. “오늘부터 조금씩 배우시면 됩니다.” 한씨는 솥뚜껑을 열었다. “저는 안 배웁니다.” “이달이 끝나기 전에 모두 배워야 합니다.” 한씨는 연이 쪽으로 국 그릇을 밀었다. “그럼 아침밥은 누가 지어요?” 도윤은 종이를 접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었다.
연이가 국을 담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 들어온 쌀도 봐 주실래요?” 한씨가 연이를 돌아보았다. 연이는 그릇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두 말이 왔는데 장부에는 한 말이라고 했어요.” 도윤은 부엌 문 옆의 장부를 펼쳤다. 장부에는 쌀 한 말이라고 적혀 있었다. “쌀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 자루에 있어요. 남은 쌀은 내일 아침에 쓸 거예요.” 한씨는 쌀 자루 앞을 막아섰다. “장부를 고치지 않으면 누가 쌀을 가져갈 겁니다.”
도윤은 붓을 들었다가 연이에게 장부를 보여 주었다. “여기 쓴 말을 읽을 수 있습니까?” 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한씨도 장부를 보지 않았다. “그 글을 읽을 수 있으면 아침마다 묻지 않아도 되겠죠.” 도윤은 새 종이에 큰 글자로 ‘쌀 두 말’을 썼다. “이건 쌀입니다. 여기에 두 말이라고 썼습니다.” 연이가 손가락으로 쌀 자루를 가리켰다. “이 글자가 쌀이에요?” “네, 쌀입니다.”
한씨는 솥 밑에 장작을 하나 더 넣었다. “장부부터 고쳐 주세요. 그동안 종이는 여기 두세요.” 도윤은 장부를 고치고 새 종이를 솥에서 먼 곳으로 옮겼다. 한씨는 국을 한 번 젓고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연이야, 너부터 써 봐.” 한씨는 연이에게 붓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