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통 안의 느린 변화 냉장고에서 막 꺼낸 김치통을 열면, 먼저 차가운 냄새가 올라오고 붉은 양념 아래에서 작은 기포가 보이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짜고 매웠던 배추가 오늘은 조금 시고 부드럽다. 다음 주에 같은 통을 열면 맛은 또 달라져 있다. 이 변화는 김치가 상해서 우연히 생기는 일이 아니라, 김치통 안에서 실제로 이어지는 발효 과정이다. 그 과정은 배추에 소금을 넣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면 배추 안의 물이 밖으로 나온다. 배추 바깥쪽의 소금 농도가 높기 때문에 물이 이동하는데, 이런 움직임을 삼투압과 관련된 현상이라고 한다. 물이 빠진 배추는 처음보다 작아지고 쉽게 휘지만, 알맞게 절이면 씹는 힘은 남는다. 소금은 맛만 내는 것이 아니다. 많은 미생물은 소금이 많은 환경에서 잘 자라지 못하므로, 소금은 발효에 참여할 미생물의 경쟁 조건을 바꾼다. 그렇다고 소금이 모든 미생물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소금에 비교적 잘 견디는 유산균은 배추와 다른 재료에 원래 붙어 있다가 김치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소금이 너무 적으면 원하지 않는 미생물이 자라기 쉬워지고, 너무 많으면 유산균의 활동도 느려질 수 있다. 그래서 절인 배추를 씻은 뒤에도 발효에 필요한 만큼의 소금은 배추와 양념에 남아 있어야 한다. 배추에 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같은 양념을 넣고 김치통에 눌러 담으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다음 장면이 시작된다. 유산균은 배추와 양념에 들어 있는 당을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젖산을 만들기 때문에 김치의 신맛이 점점 강해지고, 김치 속 환경은 점점 더 산성으로 바뀐다. 젖산은 김치의 맛을 만들면서 다른 많은 미생물이 자라기 어려운 환경도 만든다. 발효 중에는 이산화탄소 같은 기체와 여러 향 성분도 생긴다. 그래서 잘 익는 김치에서는 작은 기포가 올라오거나, 뚜껑을 열 때 안쪽의 압력이 느껴질 수 있다. 처음에는 마늘과 고춧가루의 날카로운 맛이 앞에 나오지만, 발효가 진행되면 신맛과 향이 더해져 전체 맛이 달라진다. 배추 자체의 효소와 미생물의 활동도 조직에 영향을 주므로, 시간이 지나면 단단하던 잎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이때 김치가 익는다는 말은 한 가지 변화만 가리키지 않는다. 산이 늘고, 향이 바뀌고, 조직이 부드러워지는 여러 변화가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다. 같은 통 안에서도 양념이 많이 묻은 부분과 공기에 가까운 부분은 상태가 조금 다를 수 있다. 김치를 국물 아래로 눌러 두고 깨끗한 도구로 덜어 먹는 까닭도 이런 조건을 가능한 한 고르게 지키기 위해서다. 이제 김치통이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면 변화가 멈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가운 곳에서는 발효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느려진다. 온도가 낮아지면 유산균의 활동과 여러 화학 변화의 속도가 내려가기 때문이다. 실온에 둔 김치가 빨리 시어지는 것과 냉장고 속 김치가 천천히 익는 차이는 여기서 생긴다. 냉장고 안에서도 문 가까운 곳은 온도 변화가 비교적 크고, 안쪽은 더 안정적인 경우가 많다. 김치통을 자주 꺼내 오래 열어 두면 통 안의 온도도 오르내린다. 따라서 같은 조리법으로 담근 김치라도 어디에 두었는지에 따라 익는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 첫 주의 김치는 배추의 단맛과 소금 맛, 생생한 양념 맛이 비교적 뚜렷할 수 있다. 다음 주에는 유산균이 만든 산이 더 쌓이면서 신맛이 커지고, 처음의 매운 향은 다른 향과 섞인다. 그다음에는 산미가 더 강해지고 배추가 더 부드러워져, 그대로 먹기보다 찌개나 볶음밥에 잘 맞는 맛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김치가 똑같은 주 단위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소금의 양, 재료의 당, 배추를 자른 크기, 담근 뒤의 온도와 보관 상태가 모두 발효 속도에 영향을 준다. 냉장고 온도가 같아 보여도 김치통의 크기와 위치, 통을 여는 횟수에 따라 작은 차이가 쌓인다. 그래서 지난주에 알맞았던 신맛이 이번 주에는 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김치의 맛은 완성된 뒤 그대로 머무는 맛이 아니라, 소금이 길을 정하고 유산균이 움직이며 추위가 속도를 늦추는 동안 계속 이동하는 맛이다.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낸 뒤 한 조각을 먹어 보면, 그 느린 변화가 혀끝에서 바로 확인된다.